Rambling
어제 또 비가 내렸다. 날이 무덥고 끈적끈적한 느낌이다. 금년 장마는 정말 길고 비가 많이 내렸다. 밝은 햇살 못 본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정상적인 날씨였다면 뜨거운 햇살에 한낯에는 밖에 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물론 열대야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올 한 해 여름밤은 편했다. 사상 최고로 길고 긴 장마로 지금까지 열대야가 거의 없었으니까.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던 그 장마가 마침내 물러났다. 오늘 아침에는 창밖에서 매미가 시끄러울 정도로 울어댄다. 그래도 그 소리가 반갑다. 계속되는 장맛비에 매미 울음소리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여름이었다. 아침 뉴스에서 긴 장마로 인한 일조량 부족으로 농작물이 병충해에 더욱더 취약해져서 걱정이라고 한다. 뉴스를 보면 온 세상이 걱정거리 일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어제는 광복절이었다. 예전 광복절은 정말 좋은 날로 여겨진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어제는 친일 청산 논란으로 시끄러웠나 보다. 요즈음 우리나라 사회는 과거 지향적인 방향으로 회기 하는 경향이 강해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국가의 중요 정책들이 먼 미래까지 바라보고 사려 깊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별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결정 실행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즉 사회의 각 구성원들의 다양한 의견, 심지어는 정 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서 사회의 여러 문제을 해결할 수 있는 최적의 해결 방법을 찾는 과정을 생략하고 속전속결로 정책을 결정해서 바로 실행해 옮긴다. 세상 일 돌아가는 모습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는 없는 민초라 해도, 이런 방식으로 가는 것은 결코 좋은 경향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다.
어제 손녀딸 보러 딸내미 집에 가는 길에 들렀던 대형 마트에서 집사람이 때 이른 귤을 샀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 씻고 누어 눈을 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딸 집 냉장고에 정리해 놓은 조그만 플라스틱 상자의 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바로 32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모습이 생각났다. 아버지께서는 일제강점기 말기, 20대 초반의 나이에 일본의 강제 징용에 끌려가셔서 광산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시다가, 해방 후 배편으로 귀국하신 분이다. 하지만 그때의 일들에 대해서는 강제징용을 다녀오셨다는 사실과 미깡(귤)과 관련된 일화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모든 것을 잊고 싶으셨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추운 겨울밤 귤껍질을 까 드시면서 가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일본 광산으로 징용 갔을 때, 매일매일 노역에 너무 고통스럽고 배가 고팠지. 그런데 무슨 좋은 날만 되면 일본 놈들이 특별식으로 이 미깡 두 개를 줬어. 지금은 이 미깡 껍질을 까서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지만, 그땐 껍데기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어. 그런데 이 미깡 껍데기가 엄청나가 달고 맛나더라. 지금은 쓰레기로 버리는 이것이..."
나는 여덟 남매(그중 2형제는 유아기에 사망함)중 일곱째로 태어나서 우리 부모님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어린 나는 그 일들에 대해 자세히 여쭤보지 못했다. 이후 이런 문제에 대해 의식을 가지고 아버지의 그 경험에 대해 더욱더 깊이 알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만큼 성장했을 때에는 아버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안 계셨다. 아버지의 이런 삶의 굴곡이 당신 아들의 삶에도 심대하게 부정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어찌할 수 없었던 일에 계속 집착해서 나의 인생길 가는데 걸림돌이 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느 시점에서 정리하고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 살이 어찌 보면 정말 어이없게 웃기는 것 같다. 내 잘못 하나 없이 그런 시대 그런 곳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고통을 겪고 굴곡진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요즈음은 더욱더 그렇게 느껴진다. 그냥 배운 대로, 옳다고 생각되는 대로, 그저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왔는데, 어느 날 자신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일로 제한을 받고, 압박감을 느끼고, 마음의 고통을 받는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것 같으니 말이다. 이제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에도 압박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내 생각,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 무섭다. 물리적인 제재가 무서운 건 아니다. 그냥 뭔가가 두렵다.
같은 의견을 공유하는 소수의 사람이 다양하게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억압하고 입을 막는 것은 결코 좋은 처사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같은 의견을 가진 다수의 사람들이 다수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소수의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무시하고 억압 강제하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를 두렵게 할 만큼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최고 장점은 생각과 의견의 다양성이며, 그 생각들을 두려움이나 억압감 없이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명한 명제가 요즈음은 보편적인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것 같아서 두렵고 걱정된다.
살면서 깨닫는 것이 엄청나게 많지만 최근에는 이 깨달음이 새롭게 느껴진다. 그것은 어떤 중요한 일을 판단하고 결정할 때에 나와 생각이 비슷하거나,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보다는, 전혀 다른 생각,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말이 더욱더 많은 도움이 된다는 깨달음이다. 물론 다른 의견, 반대되는 이야기를 아무 감정 없이 듣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대들 듯, 내 권위를 훼손하는 태도와 말투로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을 참고 듣는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더 최적의 문제 해결방법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아마 다른 시점, 다른 방향에서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산 정상을 올라가는 길이 어디 한 길 뿐이겠는가. 내가 저 봉우리를 향해 올라갈 때 그 넘어 반대편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오르는 사람이 또 있을 텐데, 어찌 내가 가는 길이 최선이라고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사람은 나와는 전혀 다른 바위와 나무와 생명들을 보면서, 다른 소리를 듣고 다른 바람을 느끼면서, 무엇보다도 다른 생각을 하면서 산을 오르고 있다. 어쩌면 내가 선택한 길이 더 거칠고 험해서 더욱더 힘이 들고 위험한 길일 수도 있다. 그러니 자신이 듣기 싫은 말 한다고 무시하거나 거친 말로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고 마음에 맞지 않는다며, 다수의견이라는 이유로 소수의 사람들의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심지어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견만을 강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빗소리 멈춘 창밖에서는 여전히 매미가 울어댄다. 저 매미 소리가 지금은 좋은 소리로 느껴지지만 며칠 지나면 시끄럽고 귀찮은 소음으로 들려올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 내가 옳고 진리라고 생각한 것이 문득 어느 날 오류였고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고 깨닫는 때가 오기도 한다. 세상일 그런건데...
... 어찌 나와 다르다고, 생각이 다르다고 그렇게 모질게 말하고 행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