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My Stories)

가을 하루의 중얼거림...

etLee 2023. 10. 15. 21:55

  평생 업으로 했던 일에서도 퇴직했고 이제 환갑도 지난 지 오래다. 이제는 지하철 탑승 요금도 면제받을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젊은 시절, 32개월 군 생활을 마무리하고 전역한 후 몇 년 동안의 동원 예비군이 끝났을 때에도 가슴 후련했었고 예비군이 끝났을 때에는 정말 많이 행복했다. 그런데 마지막 국방의무였던 민방위에서 퇴출될 때가 가까워질수록  한해 한해가 소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끔은 민방위 대원으로 계속 남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오전 9시가 조금 넘어 산속 산책을 위해 집을 나서 지하철을 탔다. 일요일 오전이라서 그런지 빈자리가 있어 앉았다. 그리고 시간이 천천히 흐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드에서 지하철 요금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오늘을 축복의 소리로 여겨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문득 아직도 공짜 전철을 탈 수 없는 게 마냥 좋았다. 아직은 조금 더 젊다는 뜻이니까. 하루하루 살면서 뭔가 얻어 쌓이는 것보다는 상실이 더욱더 많아지는 나이가 되었지만, 한순간 나에게 아직도 남은 게 너무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산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날씨가 무더울 때에는 젊은 사람들 보다는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이 압도적이었지만 오늘은 청년들이 많이 함께 해서 좋았다. 어제 비가 내려서 그런지 하늘도 맑았고 바람도 상쾌했다. 예년 이맘때에 북한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좀처럼 보기 어려웠지만 금년에는 끊임없이 물소리가 들려왔다. 힘들어 잠시 그늘에 앉아 쉴 때 모기의 습격이 사라져서 좋았고 여기저기 가을꽃들이 피어서 아름다웠다. 이따금 말벌 소리가 들려올 때에는 섬뜩함도 느껴졌지만 낙엽 떨어지는 소리에 곧 잊혔다. 

 

  가끔은 사소함에 행복을 느껴보고 싶을때가 있다. 오늘이 나에게는 그런 날이었다. 아침 눈을 뜨니 그냥 피곤하고 귀찮고 우울했다. 식사하고 양치하고 기계적으로 산에 갈 준비하고 나섰다. 전철역까지 7분 정도 시간이 걸린다. 마음이 무겁게 느껴져서 의도적으로 행복해 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오늘 하루 행복했다. 

 

  지구 저편에서는 서로 죽이는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 전쟁의 이유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겠지만, 그 어떠한 이유도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 오늘 난 행복했지만 그 전쟁 속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에이고 슬펐다. 오늘밤 잠들어, 이른 아침 눈뜨면 지구에서 전쟁이 모두 멈춰졌다는 소식이 함께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