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직장에서 퇴직 후, 내 삶의 일주일 중 이틀은 손자, 손녀와 보내는 시간이다. 매주 서울에서 양주까지 전철 왕복 여행을 한다. 손자 손녀 산후 조리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온갖 병치레를 함께 겪으며 아기들 돌보는 행복에, 내가 늙어가는 것조차 잊고 살아 온 세월이 어느덧 5년이 넘었다. 어제는 노동절이라 아기들을 놀이방에도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종일 손자, 손녀와 시간을 보내고 기진맥진이 되어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왔다.
겨울과는 달리, 요즈음은 아기들과 산책하기에 좋은 날이라서 많은 시간을 아파트 단지 내를 산책도 하고, 어린이 놀이터에서 아기들과 놀아주며 시간을 보낸다. 아파트 단지 내 길을 따라 펼쳐진 녹지에는 봄 계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 꽃들이 피고 지며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우리 손자 손녀는 봄꽃 중에 유별나게 길가에 피어난 노란 민들레를 좋아 한다. 특히 꽃이 지고 하얀 솜털 같은 홀씨가 맺히면, 그 것을 따서, “후” 하고 불어 바람에 날려 보내는 것을 좋아 한다.
어제 산책 중에도 여러 차례나 홀씨를 날려 보내며 즐거워하는 우리 아이들을 지켜 보며 문득 최근 우연히 접하게된 광고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나마 민들레 홀씨를 들고 있는 손자 손녀가 걱정되었다.
며칠 전에 휴대 전화기를 통해 뉴스 기사를 읽는 중이었다. 기사들 속에 숨겨져서 클릭을 유도하는 광고가 최근에 부쩍 잦아졌다. 그리고 나도 예외 없이, 그런 광고에 유도되어 “우리 아이 펫보험” 광고 글을 클릭하게 되었다. “평균 양육비 중 반려 견은 38.5%, 반려 묘는 45%가 병원비!” 라고 시작하는 보험 광고였다.
평생 하던 일이 언어를 가르치는 일이라서 호기심에 그 광고 글에 포함된 단어들의 한글 사전 의미를 검색했다. 먼저 “양육”이라는 단어를 입력하고 클릭 했다. 다음 한국어 사전에서의 정의는 “1. 아이를 잘 자라도록 기르고 보살핌, 2. 잘 자라고 보살피다”였다. 다음 우리말 사전의 첫 번째 정의에서는 기르고 보살피는 대상이 “아이”라고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정의에서는 그 대상이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도 양육 대상이라고 해석 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집에서 기르는 반려동물들 지칭할때 사람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우리 아이"라고 표현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아이”라는 단어를 입력하여 검색했다.
그랬더니 "아이" 는 명사로 다음과 같이 3가지로 풀이되어 있었다.
1. 나이가 어린 사람.
2. 남에게 자기 자식을 친근하게 이르는 말
3.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
즉 “아이”의 사전적 의미에서 그 대상은 오로지 사람이었다. 동물이나 식물을 아이라고 지칭하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 다른 우리말 사전에서는, 반려 동물을 "아이"로 지칭하기도 한다는 설명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한 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 중에 하나가 “언어는 (change)변 한다” 이고, 언제부터 인가 반려 동물을 “아이”라고 흔히 들 말하니까, 그렇게 해도 전혀 문제 없는 것 처럼 여겨지는 것 같다. 세상 모든 것이 상대적이지 절대적인 것은 없으니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착해서 반려 견을 산책 시킬 때 “똥”을 누우면 가지고 나온 비닐봉지에 담아 간다. 하지만 소변은 그렇게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민들레 홀씨를 날리며 즐거워하는 손자, 손녀들을 보면서 잠시 걱정스러운 게 바로 그 점이었다. 아직 유치원도 갈 수 없는 어린 아기들의 작은 손에 쥐어진 그 민들레 홀씨에 강아지 오줌이 묻어 있지나 않았을 까 하고 걱정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2-3주 전인가, 이제 3돌 갓 지난 손자 녀석이 저만치 앞서 뛰어 가다가, 멈춰서 앉아서 풀숲사이에 얼굴을 묻고 뭔가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도 궁금해서 얼른 뛰어서 가까이 가보니 푸른 풀잎들 사이에 뭔가 검정색 물체가 있었고 손자 아이는 그것에 얼굴이 닿을 만큼 가까이 하고 살펴보고 있었다. 놀랍고 당황스럽게도 그 물체는 꽤 오래되어 바싹 말라버린 개 “똥”이었다. 내가 조금 늦어서, 손자를 제지하지 못했다면 우리 아기가 남의 집 아이(?}의 똥을 집어 들어 만지작 거리는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날 나는 딸에게 그 일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다. 다 내 잘못, 내 탓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손주 돌보기는 하지만 내 잘못으로 사소한 일이 생길수 있다는 걱정을 떨쳐 낼 수 없어 항상 조심 스럽다. 그렇게 아기들과 하루하루를 지내면서, 어른이 될 때 까지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인가 보다. 다 "내 탓이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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