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에 북한산 산행을 했다. 구파발까지 전철을 타고 가서, 구파발 역에서 북한산까지 주말에만 운행되는 버스를 타고 북한산성 입구에서 내렸다. 하늘에는 구름이 많이 끼었지만 전날 비가 내려서 그런지 구름 사이에 보이는 하늘은 정말 푸르고 맑았다. 상쾌한 기분으로 힘차게 걷다가, 산 입구 등산용품 상점에서 거의 땡처리 세일(만원)로 나온 멋진 등산 모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살펴봤다.
가격표시 라벨은 떼어져 없어, 원래의 가격은 알 수 없었지만, 내 머리 크기에도 잘 맞고 색깔도 어울리는 것 같아 정말 기분이 좋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틀 전 홈플러스에서 상표도 없는 Made in China, 짙은 남색 모자가 맘에 들어 오천 원에 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자를 처음 쓰고 산행을 시작할 때에 새 모자를 발견했다. 인생사 어이없게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래도 그냥 집 어딘가에 내팽개쳐 두었다가 버리게 되는 것도 할 짓이 아니다. 더군다나 무지막지하게 물건을 많이 소비하고 버려서 이 지구가 쓰레기로 신음하고 있는 이 시대에 말이다. 색깔이나 모양이 마음에 들었고, 살 때는 싸다고 산 물건이니까 교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바로 그 남색 모자 쓴 내 모습이 멋져 보이고 모자에도 정이 갔다.
보통 초가을 날씨, 이맘때였다면 북한산 계곡에는 물이 많지 않았겠지만 금년에는 달랐다. 그래서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산을 오르는 것이 마냥 즐겁고 행복하게 느껴졌다. 아직은 완전한 가을이라고 할 수 없어 나뭇잎도 푸르고 수풀 많은 곳에서는 산속 모기들이 많이 덤빈다. 북한산에도 많지는 않지만 군데군데 밤나무들이 있다. 그래서 이맘때가 되면 떨어진 밤송이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밤나무들이 늙어 고목이 되어서 사람이 먹을 만큼 큰 밤이 열리지 않으며, 가끔 있다 해도 대부분은 벌레 먹은 것이기에 눈으로만 보고 즐기면 그만이다. 그러면 다람쥐들이 행복해져서 더 좋다.
대남문 가기 1Km 남은 어느 길 바로 옆에는 머루 나무가 있어 매년 열매 맺는다. 거의 매년마다 맺힌 머루알 빛깔이 조금이나마 보랏빛이 들 때까지 나무에 매달여 있었는데 금년에는 사람들이 성급했나 보다. 바로 한주 전에 산을 오르며 살펴보니 모두 사라지고 잎만 무성했다. 그래도 내년에도 여전히 새 열매가 맺힐 것이다. 아무튼 오늘은 대동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동문 가는 길에 허기가 져서, 앉아 쉬면서 가져간 비스킷을 먹으며 허기를 채우고 있었다. 그 길은 평소 주말에도 인적이 많지 않다. 그런데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어 소스라치게 놀랐다. 김밥을 먹어야지 그것으로 배가 차느냐고 하면서... 나는 괜찮다고 했다.
대동문 주변에는 넓은 공터가 있어서 평소에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도시락을 먹거나 쉬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Covid-19의 여파로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게 줄을 쳐서 막아 놓았다. 혼자 편히 앉아 쉴 곳도 없어 나는 북한산 성벽을 따라 보국문을 향해 갔다. 아직 단풍 물든 나무는 없었지만 가을꽃들은 여기저기 피어있었다. 봄 들꽃들과는 달리 가을꽃들은 향도 많지 않고, 색깔도 그리 다양하지 못하다. 꽃 크기도 작고 소박하며 대개는 흰색이나 보라색 계통의 꽃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꽃들을 보면 애잔하고 때로는 조금은 슬픈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일명 들국화로 불리는 꽃들이 그렇다. 대학 1학년 가을 MT 갔을 때 흐르는 강물에 꽃잎을 띄어 보내던 추억이 애잔하게 하는 꽃이 바로 그 보랏빛 들국화였다.
보국문을 지나 힘겹게 성주 능선 길을 오르다 보면, 잠시 쉬면서 북한산 주봉인 백운대와 만경대, 그리고 인수봉이 보이는 곳이 있다. 오늘은 날씨가 좋고 구름도 적잖아서 보기도 아름답고 사진 찍어 보관하기 좋은 날이었다. 오랜만에 이 길을 따라 산길을 걸으니 생각도 많아지고 많은 것이 새롭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평생 수십 년을 거의 매주 같은 산 같은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길 어떤 능선에 어떤 나무와 풀이 자라고, 어떤 계절에 어떤 들꽃이 피는지 대충 알게 된다. 그리고 비바람에 파이고 깍겨나간 모습들까지도 알게 된다. 북한산성을 복원한 지 별로 오래 지난 것 같지 않은데 사람의 발길에 차이고 비바람에 깍겨나가서 그런지 성곽 기초 부분이 깊게 파여서 붕괴 가능성이 있는 곳이 눈에 보였다. 그곳을 지나면서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알아차리고 이 가을에 보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대성문을 지나 대남문까지 갔다.
최근 2년 동안 대성문과 대남문의 보수공사가 있었다. 특히 대남문은 석조 부분까지 들어내고 금이 가거나 깨어진 성벽을 새로운 화강암 성벽으로 교체해서 복원하는 큰 공사였던 것 같다. 지난 겨울부터 봄까지 보수 공사로 인해서 대남문을 바로 지나쳐야 했는데 이제는 그곳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며 쉬어 갈 수 있어 좋았다.
오늘은 거기까지였다. 대남문을 통해 구기동 길을 따라 산을 내려왔다.
'내 이야기(My Stori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한 시대, 요지경 세상 (0) | 2020.10.14 |
---|---|
딸, 그리고 아들 (0) | 2020.10.08 |
호두나무 세 그루 (0) | 2020.09.10 |
성룡 영화 안보기 (0) | 2020.09.07 |
아보카드 키우기 (0) | 2020.09.04 |